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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그자체! 김부식 사실 나만알고싶어요. 간절곶 이정도 알아야지!ㅋㅋ나도놀랐엌ㅋㅋ

by 마큐리스 20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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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nter;"> 김부식(金富軾)1)은 김부일(金富佾)의 동생으로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2)로 보임되었다가 임기가 차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고 우사간(右司諫)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하였습니다.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이 왕의 국구(國舅)3)로서 국정을 맡으니, 왕은 조서를 내려 “이자겸은 짐에게 조부가 되니 백관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양부(兩府)4)와 양제(兩制)5) 및 여러 시종하는 관리들은 모여 의논한 후 보고하라.
”고 하였습니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정극영(鄭克永)과 어사잡단(御史雜端) 최유(崔濡)가 의논한 후“전(傳)에서 ‘천자에게는 신하로 삼지 못할 사람이 셋 있습니다.
’고 하였는데, 왕후의 부모가 그 하나에 해당됩니다.
이제 이자겸은 표를 올릴 때 자신을 신하라 낮추지 말 것이며, 군신간의 연회에서는 관리들과 함께 뜰에서 축하하지 말고 바로 주상의 장막으로 가서 절하면 주상께서 답배하신 뒤에 전(殿)에 앉게 하여야 합니다.
”라고 보고하니 뭇 의견도 다들 그 말을 따랐다.
김부식은 당시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서 홀로 이렇게 반대했습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닷새에 한 번씩 부친인 태공(太公)을 찾아뵈니, 태공의 집사가 태공에게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는 법입니다.
황제께서 비록 아드님이시지만 군주이며, 태공께서 비록 부친이 되시나 신하이니, 어찌 군주로 하여금 신하에게 절을 올리게 하겠습니까?’라 했습니다.
고조가 그 집사의 말을 옳게 여기고 ‘사람 가운데 지극히 가깝기로 치자면 부자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친이 천하를 차지하면 그 천하가 아들에게로 전해지고 아들이 천하를 차지하면 그 존귀함이 부친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의 도리 가운데 지극한 것입니다.
이제 왕·후·경·대부가 이미 짐을 높여 황제로 부르는데, 태공께서는 아직 호(號)를 가지지 못하셨으니 이제 태공에게 존호를 올려 태상황(太上皇)이라고 하겠노라.
’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사례를 들어 논해 보자면, 비록 천자의 부친이라도 존호가 없으면 군주가 큰 절을 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불기후(不其侯) 복완(伏完)6)은 헌제(獻帝) 황후(皇后)의 부친이지만, 정현(鄭玄)7)은 ‘불기후가 수도에 있으면서 의례를 향할 때나 궁중에 출입할때는 신하의 예를 따라야 할 것이요, 황후가 이궁(離宮)에서 휴식하거나 부모에게 근친하려 가면 자식의 예를 따라야 합니다.
’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복완은 조정에 입조하여 하례할 때는 다른 신하들처럼 행동하였고, 황후가 궁궐에 있을 때는 황후가 자녀처럼 절을 하였습니다.
또한 동진(東晋)의 신하들이 목제(穆帝)의 모친인 저태후(褚太后)가 자기 부친을 뵙는 예에 대해 의논하며 이러니저러니 통일이 되지 않자, 박사(博士) 서선(徐禪)이 정현의 의견에 의거하여 ‘조정에서는 왕과 신하의 예를 바르게 하고, 사사로이 뵈올 때는 어버이와 자식 간의 친근함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이치에 크게 맞는 도리다.
’고 하였습니다.
또 위제(魏帝)의 아버지 연왕(燕王) 우(宇)는 표를 올리면서 자신을 신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어버이와 자식 사이가 지극히 친근한 사이일지라도 예법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외조부의 경우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의례(儀禮)』의 오복(五服)8) 제도를 살펴보면, 모친의 부모가 죽었을 경우 소공(小功)9) 다섯 달만 상복을 입을 뿐이니, 자기의 부모와는 존중하고 친근함에 큰 차이가 있는데, 어찌 외조부가 주상과 예를 대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표를 올릴 때는 마땅히 신이라고 해야 하며, 조정에 있을 때는 왕과 신하의 예를 행하고 궁궐 안에서는 집안 사람의 예로 서로 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합니다면 공적인 의리와 사적인 은혜, 두 가지가 다 순조로울 것입니다.
”재상들이 두 의견을 보고하자 왕은 근신 강후현(康侯顯)10)을 보내어 이자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자겸이,“신이 비록 무지하오나 지금 김부식의 의견을 살펴보니, 참으로 천하의 공변된 의논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여러 공(公)들이 늙은 저를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게끔 부추길 뻔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의견을 따르시어 의심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니, 왕이 그러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얼마 후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睿宗實錄)』11)을 편찬하였고, 인종 2년(1124)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전임되었다.
왕이 이자겸의 조부를 추봉하자 박승중이 이자겸에게 잘 보이려고 분황(焚黃)12)하는 날에 교방(敎坊)13)의 음악을 내려주도록 왕에게 청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렇게 반대하였습니다.
“종묘제례에서 음악을 쓰는 것은 선왕이 살았을 때와 같이 하기 위함입니다.
분묘(墳墓)의 경우 소복을 입고 일을 치르며 심지어 울기까지 하는데 어찌 음악을 연주하겠습니까?”박승중이 또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자고 청하자, 김부식은,“생일을 절(節)이라고 하는 것은 예로부터 없었던 일입니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 비로소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千秋節)이라고 하였으나, 신하의 생일을 절이라고 한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고 하니 평장사(平章事) 김약온(金若溫)이 “시랑(侍郞)의 의견이 옳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인종 4년(1126) 어사대부로 임명되었고, 호부상서·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였으며, 평장사(平章事)로 승진하고 수사공(守司空)에 올랐다.
12년, 왕이 묘청(妙淸)의 말을 쫓아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재앙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김부식은,“금년 여름에 서경의 대화궁(大華宮)14) 서른 여 곳에 천둥 번개가 쳤습니다.
만약 여기가 좋은 땅이라면 하늘이 필시 이같이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곳에서 재앙을 피하려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서쪽 지방은 추수가 끝나지 않아 주상의 행차가 지나가면 반드시 곡식을 짓밟게 될 것이니 이는 백성을 어질게 대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라며 반대했습니다.
또 간관(諫官)과 함께 소를 올려 극력 반대하자, 왕은 “말한 바가 지당하니 짐이 서경으로 가지 않겠다.
”고 하였습니다.
13년(1135) 정월에 묘청이 조광(趙匡)·유참(柳旵) 등과 함께 서경에 웅거하여 반역15)을 일으켰다.
왕이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중군(中軍)을 지휘하게 했는데, 김정순(金正純)·정정숙(鄭旌淑)16)·노영거(盧令琚)17)·임영(林英)·윤언이(尹彦頤)·이진(李瑱)18)·고당유(高唐愈)19)·유영(劉英)이 그를 보좌하였습니다.
이부상서 김부의(金富儀)에게 좌군(左軍)을 지휘하게 하고, 김단(金旦)·이유(李愈)20)·이유개(李有開)21)·윤언민(尹彦旼)22)이 그를 보좌하였습니다.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23)에게 우군(右軍)을 지휘하게 하고, 진숙(陣淑)24)·양우충(梁祐忠)·진경보(陳景甫)·왕수(王洙)25)가 그를 보좌하였습니다.
서경 사람들이 조서를 위조하여 급히 양계(兩界)에서 군사를 징발하자, 왕은 진숙·이주연·진경보·왕수를 보내어 우군 2천명을 나누어 인솔하고 동쪽 길로 가서 여러 성을 효유하는 한편 적도들을 수색하게 하였습니다.
또 김부의에게는 좌군을 인솔하고 먼저 서경으로 빨리 진격하게 하였습니다.
왕이 양부(兩府)의 대신들을 불러 출병에 대한 의견을 묻자, 김부식은 재상들과 의논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서경의 반역을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26)·백수한(白壽翰)27) 등이 함께 모의하였으니, 이 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서경은 평정될 수가 없습니다.
”재상들이 그 말을 깊이 수긍하고서 정지상 등 세 명을 부른 다음, 몰래 김정순에게 알려 날랜 군졸들로 하여금 세 명을 끌어내어 궁궐 문 밖에서 참수케 하고나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왕이 천복전(天福殿)에 나오자 김부식이 군복 차림으로 들어가 뵈니, 섬돌 위로 올라오게 하고는 친히 부월(鈇鉞)을 주어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습니다.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은, 경이 명령을 이행한 자는 상을 주고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자28)는 벌을 내리는 등, 전권을 행사하라.
그러나 서경 사람들도 다 나의 자식들이니 그 괴수는 섬멸해 버리되 신중히 하여 많이 죽이지는 말라.
”우군이 먼저 진격해 마천정(馬川亭)에 숙영하고 중군은 금교역(金郊驛 :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 강음)29)에 숙영했습니다.
정찰 기병이 서경의 첩자 전원직(田元稷)을 잡아오자, 김부식은 포박을 풀어주면서,“돌아가서 성 안 사람에게 말하라.
대군(大軍)이 이미 출동하였으니 잘못을 뉘우치고 귀순하는 자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곧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위로하며 돌려보냈습니다.
당시 군사들이 우쭐한 마음으로 금방 이기고 돌아갈 것이라고 여긴 나머지 준비해 온 두터운 옷이 적은데다, 마침 눈까지 내려 군사와 말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게 되었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김부식이 잘 타이르는 한편 보급품을 지급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왕은 홍이서(洪彛敍)30)와 이중부(李仲孚)31)가 서경 사람들과 같은 일당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조서를 주어 서경에 가 반란군을 효유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홍이서 등이 느릿느릿 길을 가 사흘 만에야 생양역(生陽驛 : 지금의 평양특별시)32)에 도착하고는 겁을 내어 더 가지 못하고 역리(驛吏)를 시켜 조서를 전하게 하고 돌아왔다.
김부식은 홍이서를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가두고 이중부는 백령진(白翎鎭 : 지금의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으로 유배했습니다.
보산역(寶山驛)33)에 이르러 3일 동안 군사를 사열한 후 장수와 참모들을 모아 작전을 의논하자 모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전투에는 신속함이 제일이니 먼저 기동합니다면 적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제 대군이 이미 출병하였으니 중무장을 버리고 신속히 기동하여 적이 방심한 틈을 타서 불시에 공격하면, 저 하찮은 도적떼들 쯤이야 빠른 시일 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가는 곳마다 머무르게 되면 반드시 실기할 것이며, 적으로 하여금 작전을 세울 시간을 벌게 할 것이니 우리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다음과 같이 반대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서경이 반역을 꾸민 지가 벌써 5~6년이나 되었으니 그들이 세운 작전은 반드시 치밀할 것입니다.
또 전투와 수비의 기구를 갖춘 뒤에 거사한 것이니 지금 방심을 틈타 기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게다가 우리 군사는 적을 업수이 여기는 경향이 있고 병장기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갑자기 공격하는 복병을 만나게 되는 것이 첫 번째 위태로울 일입니다.
또 견고한 성 아래에 군사를 둔치게 했는데 날씨는 춥고 땅이 얼어서 방어벽을 만들지 못한 터에 불시에 적에게 기습당하는 것이 두 번째의 위태로울 일입니다.
또 적이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양계(兩界)의 군사를 징집하니 여러 성이 긴가민가하며 진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는 말이 들리는데, 만일 어떤 간악한 자가 그들과 내응하여 안팎으로 서로 결탁해 보급로를 막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군사를 인솔해 샛길을 따라 적의 배후로 둘러 나간 다음, 여러 성의 군량을 거둬들여 대군을 먹여야 합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잘 타일러 서경의 적들과 분리시킨 다음 원병을 보내어 군사들을 쉬게 하고 적도들 가운데 격문을 살포하면서 서서히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최선의 작전입니다.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평주(平州)를 거쳐 관산역(管山驛 : 지금의 황해북도 신계군)34)으로 달려가 좌군·우군이 다시 집결한 다음 나란히 차례대로 행군하였습니다.
김부식은 사암역(射岩驛)과 신성부곡(新城部曲 : 지금의 황해북도 신계군)을 거쳐 성주(成州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로 질러가서 하루 동안 군사를 쉬게 한 후 모든 성에 격문을 급히 보내어 왕의 명을 받들어 적을 치는 뜻을 알렸다.
또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를 보내어 서경을 초유하면서 성안의 사정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모든 군사를 이끌고 연주(漣州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로부터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에 도착하니, 진숙(陳淑)과 이주연(李周衍) 등이 동계(東界)로부터 와 집결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시켜 조칙을 가지고 잠행하여 양계의 성(城)과 진(鎭)을 두루 다니면서 서경 사람들이 반역한 상황을 알리고 효유하도록 했으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사태를 관망만 하며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군이 도착하자 여러 성이 크게 두려워하며 나가서 관군을 맞이하였습니다.
김부식이 다시 막료들을 보내어 서너 차례 효유하니, 조광(趙匡) 등이 버틸 수 없음을 알고 투항하려 했지만 죄가 무거움을 스스로 알고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평주판관(平州判官) 김순부(金淳夫)35)가 조서를 가지고 입성하자 서경 사람들이 그제야 묘청과 유참(柳旵) 및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 등을 참수한 다음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36) 윤첨(尹瞻), 소감(少監) 조창언(趙昌言), 대장군(大將軍) 곽응소(郭應素), 낭장(郞將) 서정(徐挺) 등으로 하여금 김순부와 함께 개경의 조정에 가서 대죄(待罪)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중군(中軍)에,“삼가 조서의 뜻과 원수(元帥)의 말을 받들고서 이미 그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대궐로 달려가 바쳤습니다.
양고기와 술을 군사들에게 먹이어 위로하고자 하오니 날짜를 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글을 보냈습니다.
이에 김부식은 녹사(錄事) 백녹진(白祿珍)을 보내어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양부(兩府)에, 윤첨 등을 후하게 대우하여서 개과천선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는 글을 보냈습니다.
재상(宰相) 문공인(文公仁)·최유(崔濡)·한유충(韓惟忠)37)이 백록진에게 다음과 같이 힐난하였습니다.
“너의 원수가 바로 서경(西京)으로 빨리 가지 않고 우회로를 따라 안북(安北)으로 진군하길래, 우리들이 주상께 아뢰어 단 한 사람을 보내어 조서를 지니고 가 항복하도록 효유했으니 적이 항복한 것은 네 원수의 공이 아니다.
네가 온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또 김순부가 성 밖에 도착하자 윤첨 등을 그 자리에서 포박했고, 개경으로 들어갈 즈음에 양부는 법사(法司)를 보내어 칼과 족쇄를 씌운 다음 하옥을 청하고, 대간도 극형에 처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모두 허락하지 않고서 포박을 풀어 주고 의관을 갖추어 알현하게 한 다음 술과 음식을 내려주어 위로하고 객관(客舘)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를 옥에 가두었으며 묘청 등의 머리는 큰 거리에 내걸었다.
김부식에게는 은약합(銀藥合)을 내려주면서 이런 조서를 내렸다.
“요사한 무리들이 천명을 거스르고 하늘을 두려워 않으매 그 놈들의 반란에 분노했도다.
그대가 단(壇)에 올라 부월(鈇鉞)을 받으매 대장(大將)의 출전 요청을 내 가상히 여겼도다.
또한 바람과 서리가 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사졸(士卒)들이 고생한 것을 내 가련하게 여겼도다.
이제 왕의 군사가 적의 땅을 제압하니 적의 무리가 예봉이 꺾였노라.
그 괴수의 머리를 보내오니 이미 효수하여 머리는 내거는[藁街38)] 형벌을 받은 것이로다.
이제 무기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진실로 대신[蓮幕39)]들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로다.
이제 마땅히 다시 육군(六軍)40)의 마음을 면려케 하여 끝까지 만전의 계책을 도모할지어다.
”조광의 무리들은 윤첨 등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필시 자기들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 여겨 다시 반역하였습니다.
왕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부(金阜)와 내시(內侍) 황문상(黃文裳)을 시켜 윤첨과 함께 가서 조서를 반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부 등이 위협하고 겁을 줄 뿐 좋은 말로 달래지 않자 서경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노하여 2월에 반란군을 사주해 김부·황문상과 기타 따라온 자들을 죽였다.
윤첨이 태조의 초상(肖像)을 안고 도망쳐 나가자 그를 잡아 죽이고 성문을 닫은 채로 굳게 지켰다.
김부식이 녹사(錄事) 이덕경(李德卿)을 보내 효유하게 했지만 다시 그마저 죽였다.
김부식은 장수들과 함께 황천(皇天 : 하늘)·후토(后土 : 국토를 맡은 신)·산천(山川)의 신령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습니다.
“서경의 요사한 인간들이 사악한 말로 사람을 속이고 작당하여 반역을 모의하므로, 신 등은 삼가 국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죄를 물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최상의 병법은 적의 책략을 분쇄하는 것이며, 훌륭한 지혜는 싸우지 않는 것41)’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수많은 병사들을 성 안에 횡행하게 하면 죄없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니, 이는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는 뜻과 어긋납니다.
그 때문에 군대의 출동을 억제하면서 무엇이 순리이며 역리인지를 설명했고 무엇이 복이 되며 화가 되는지를 설득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수괴의 목을 베어 대궐로 가서 대죄하게 함으로써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더니 악한 마음을 고치지 않고 배신 행위를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조서가 여러 번 내려져도 따르지 않았으며, 사신이 가기만 하면 살해를 당했으니 그 죄가 너무나 커서 도리상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천지신명께서 위에서 굽어보시고 곁에서 바로 잡으시니, 바라옵건대 더욱 저희를 도와주셔서 삼군(三軍)42)으로 하여금 기운을 더하게 하시고 반란의 원흉이 목을 내어놓음으로써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해 주십시오.
비록 보답을 바라지는 않으시겠지만 어찌 감히 은혜를 잊겠습니까? 초개(草芥)같이 작은 정성을 신께서 살펴주시옵소서.
”김부식은 서경이 북으로는 산 언덕을 등지고 삼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도 높고 험하여 순식간에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으므로 성을 에워싸고 진영을 펼쳐서 압박해 들어가야 합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군은 천덕부(川德部)에, 좌군은 흥복사(興福寺)43)에, 우군은 중흥사(重興寺)44)의 서편에 각각 진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강(大同江)이 교통의 요충이므로 적이 만약 먼저 차지해 버리면 길이 막혀 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대장군 김양수(金良秀),45) 시랑(侍郞) 양제보(楊齊寶),46) 원외랑(員外郞) 김정(金精),47) 합문지후(閤門祗候) 최자영(崔子英),48) 직장(直長) 권경량(權景亮)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며 지키게 하여 후군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진숙(陳淑)과 낭중(郞中) 왕의(王毅),49) 합문지후(閤門祗候) 전용(全鎔)·안보구(安寶龜)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중흥사의 동쪽에 주둔하게 하고 전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성 밖에는 민가가 매우 많았는데 병란이 일어난 이후 많은 장정들이 성으로 들어가 전졸(戰卒)이 되었고 나머지는 산골로 도망쳐 숨었다.
김부식은 만약 그들을 불러서 위무하지 않으면 앞으로 반드시 서로 불러 모여들어 적의 눈과 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리(軍吏)를 나누어